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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매드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집’과 ‘직장’을 잃은 여성 펀(Fern)이 밴을 타고 미국 서부를 떠도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빈곤의 기록도, 도로 위 여행기록도 아닙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노후란 무엇인가’, ‘삶의 최소조건이란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가’, 그리고 ‘자발적 선택과 필연적 유랑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펀의 삶은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자유로워 보입니다. 정주하지 않음으로써 속박되지 않으며, 뿌리내리지 않음으로써 땅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조건이 있으며, 그 조건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이기도 합니다.
현대 빈곤의 새로운 얼굴: 시스템 밖의 개인들
펀은 전통적인 의미의 ‘노숙자’는 아닙니다. 그녀는 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일시적이나마 직업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떠돌이(nomad)라 정의합니다. 하지만 그 삶의 기저에는 분명한 경제적 상실이 존재합니다. 일하던 석고 공장이 사라졌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며, 지역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진 상황은 그녀에게 선택권이 아닌 생존 조건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대 빈곤’의 한 단면입니다. 주거 형태는 있지만 안전하지 않고, 소득은 있지만 지속되지 않으며, 복지는 있지만 접근이 어려운 상태. 다시 말해 시스템 바깥에 있지만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닌’ 경계적 위치에 놓인 개인들의 현실입니다.
영화는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지도, 연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보여주고, 관객이 스스로 해석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 태도가 오히려 더 진지하게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느꼈습니다.
‘노후’에 대한 고정관념 해체
노년은 일반적으로 ‘안정’과 ‘휴식’의 시기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펀의 삶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이동하며, 낯선 환경에 계속 적응해야 합니다. 영화 속의 노년층 노매드들은 대형 할인마트, 주방 보조, 청소 업무 등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계속 이어갑니다.
이 장면들은 ‘노후에도 일해야 하는 사회’가 더 이상 예외적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퇴직 이후의 삶을 연금, 주택, 가족 기반으로 유지할 수 없는 이들은 자발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떠도는 삶을 선택합니다.
사회학적으로 이는 ‘은퇴 후 시민성(Post-retirement 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즉, 한 사람의 역할이 노동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을 경우, 은퇴 이후 개인은 사회적 소속을 상실하게 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하거나 새로운 삶의 구조를 구성하게 됩니다. 펀은 그 구조를 ‘유랑’으로 선택한 인물입니다.
선택인가 생존인가: 자발성과 필연의 경계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이 종종 “나는 이 삶을 좋아해서 계속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것은 일부 진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 가능성의 조건이 ‘이 삶뿐’일 때 가능한 수사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을 ‘선택적 순응’이라 해석합니다. 사회적 대안이 없거나 불확실할 때, 인간은 현재 조건을 미화하거나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합니다. 노매드 공동체 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응원하고, 나눔을 실천하며 분명한 연대감을 형성하지만, 그들 개개인의 출발점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명확하게 말을 아낍니다. 감독은 유랑의 자유를 찬양하지도, 그 삶을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관객이 직접 그 삶의 의미를 찾아보게 만듭니다. 저는 이 영화가 말없이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느꼈습니다.
뿌리내리지 않은 존재의 철학
펀은 영화 전반을 통해 “나는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이 이동 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위로 이상의 철학적 선언입니다. 정주하지 않음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유연성을 제공합니다. 고정되지 않음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줍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펀의 삶은 실존주의적입니다. 그녀는 본질적 의미를 외부 제도나 타인의 기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매 순간의 경험에서 추출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잃은 것이 많지만, 스스로를 상실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태도가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삶이 체계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삶이 잘못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말없이 전하고 있으니까요.
『노매드랜드』는 단순한 도로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주거, 노동, 노후,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한 편의 사회적 에세이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정착하지 않는 삶은 불안정한 것일까요, 아니면 시대가 변화하면서 등장한 또 하나의 방식일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집’, ‘직장’, ‘은퇴’ 같은 개념들은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요?
이 질문은 비단 펀이라는 캐릭터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점점 더 유동적이고 유연해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