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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기후 재난으로 인해 종말을 맞은 지구, 그리고 그 이후 생존자들이 탑승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재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란 무엇인가’, ‘권력과 계급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생존 조건이 주어졌을 때 인간은 어떤 윤리를 선택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단선적인 공간 구조(열차)를 활용해 수직적 계층 관계를 수평으로 시각화하며, 그 안에서 인간의 행동, 제도, 충성, 저항을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열차는 곧 계급의 은유입니다

열차는 명확한 구조를 가집니다. 머리칸에서 꼬리칸까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심리적, 제도적으로는 분리된 공간입니다. 꼬리칸은 노동과 억압의 공간이며, 머리칸은 사치와 지배가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사회학적으로 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 계급 구조의 공간적 비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상위 계급과, 생존만을 위해 복종하는 하위 계급 간의 구조는, 열차라는 폐쇄된 시스템 안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열차의 특징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입니다.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내부 구조는 정체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열차를 ‘진보적 겉모습을 한 정체된 사회’의 상징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불가능하고, 저항은 체계에 흡수되는 시스템. 바로 그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냉혹한 구조입니다.

생존의 조건 아래, 윤리는 작동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극한 상황 속에서 개인과 집단이 어떤 도덕적 선택을 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꼬리칸의 주민들은 최소한의 식량으로 생존하지만, 그 식량의 출처가 드러나는 장면은 관객에게 강한 윤리적 충격을 줍니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생존이 윤리를 정지시키는 지점에서 인간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묻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특히 극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규범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재난 영화뿐 아니라, 실제 재난 상황에서의 정책과 사회적 태도와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윤리학에서는 이를 ‘상황 윤리(situational ethics)’라 부르며, 절대적 기준이 아닌 맥락과 조건에 따라 윤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보여준 선택들이 이상적이지 않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지도자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

영화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반전은 ‘지도자의 탄생’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제시합니다. 주인공 커티스는 꼬리칸의 혁명을 이끄는 인물이지만, 그 역시 체제 안에서 또 다른 통제의 대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근대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헤게모니 구조’와 유사합니다. 체제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반란을 단순히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흡수하거나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통제 구조를 유지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저항은 체제 바깥에서 발생해야 하며, 체제 안의 반항은 종종 체제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합니다.

저는 커티스가 지도자로서 마주한 혼란과 선택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되는 모든 리더의 초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지도자는 선택되기보다 설계되며, 그 과정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영화는 명확히 보여줍니다.

기후 재난 이후,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조직되는가?

『설국열차』는 기후 위기가 배경입니다. 인류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인공 조절 시도를 했고, 그 결과 지구는 빙하기로 진입합니다. 즉, 선의를 갖고 실행된 과학적 개입이 오히려 파국을 초래한 상황입니다.

이 설정은 현재 진행 중인 기후 기술(예: 태양 복사 조절, 대기 중 이산화탄소 제거 등)과도 연결되며, 과학이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투영합니다. 기후 정치학에서는 이를 ‘위기적 현대성(Risk Society)’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술은 문제를 해결하지만, 동시에 더 큰 불확실성을 낳으며, 그 피해는 항상 약자에게 집중됩니다.

열차의 꼬리칸은 바로 그런 피해의 집적지이며, 시스템은 그것을 필연처럼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조가 단지 가상의 설정이 아니라, 기후 위기 시대의 사회적 구조를 미리 경고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설국열차』는 겉으로는 SF 재난 영화이지만, 실상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자 치밀한 정치철학적 실험장입니다. 계급, 윤리, 지도력, 기후 – 이 네 가지 요소가 폐쇄된 열차 안에서 충돌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묻습니다. 시스템 안에서의 혁명이 진정한 변화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참을 수 있으며, 어떤 지점에서 윤리를 포기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시스템은 과연 인간적인가?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