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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
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

 

 『히든 피겨스』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프로젝트에 기여했던 세 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과학사 속 숨겨진 영웅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이라는 중립적 공간조차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제도의 문이 열려 있어야 진정한 ‘진출’이 가능하다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음’의 구조화: 능력보다 먼저 작동하는 한계

주인공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은 모두 수학적·공학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피부색과 성별이라는 이유로 공식적 직급이나 작업 권한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동등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조차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구조적 배제(structural exclusion)’라 부릅니다. 능력이나 성과와는 무관하게, 사회 제도나 조직 관행 속에서 특정 집단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지는 방식입니다. 영화 초반, 캐서린이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서명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장면은 단순한 차별을 넘어서 제도적 사각지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능력의 발현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기회를 허용하는 구조가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기술과 젠더: 지식은 중립적이지만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과학기술은 흔히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든 피겨스』는 그 기술의 실행 현장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제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흑인 여성 수학자가 ‘색인 전용 화장실’을 찾아 800미터를 왕복해야 했던 구조, 엔지니어 교육 과정이 ‘남성만 수강 가능’하다는 관행은 ‘이성의 공간’이라고 불리는 과학 현장조차 사회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젠더 연구에서는 이를 ‘과학의 젠더화(gendering of science)’라고 설명합니다. 즉, 과학이라는 영역 역시 특정 집단의 언어, 문화, 접근 방식을 반영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이 축적되면 기술적 공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영화 속 인물들이 직면한 문제들이 단지 ‘시대적 한계’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여성, 특히 소수자 그룹의 비율이 여전히 낮다는 통계는 그 간극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리더십의 인정은 ‘기여’보다 ‘구조 변화’에서 시작된다

세 여성은 모두 뛰어난 성과를 냈지만, 그것이 즉각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리더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발휘되었습니다. 도로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입 시기를 예측하고, IBM 기계를 독학으로 익히며 팀 전체의 전환을 이끌어냅니다. 메리는 엔지니어 시험을 보기 위해 법원을 설득해 제도의 문을 스스로 넓힙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과 중심의 리더십’이 아닌 ‘제도 변화를 유도하는 리더십’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더란 단지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말합니다. 진짜 리더십은 타이틀이나 직함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때로는 가장 낮은 곳에서 구조를 바꾸는 사람으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고.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복원

『히든 피겨스』는 사실상 ‘기록되지 않았던 역사’를 다시 세상에 꺼내놓는 작업입니다. 오랫동안 NASA의 우주 프로젝트는 백인 남성 과학자들의 업적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지만, 이 영화는 그 이면에서 핵심적인 계산과 분석을 수행했던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역사학에서는 이를 ‘서사 복원’ 또는 ‘대항 서사(counter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기존의 주류 담론에서 누락되거나 지워졌던 인물과 사건을 다시 구조 안으로 포함시킴으로써, 보다 다층적인 역사 인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단지 감동을 주는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과학의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시선들을 되살리는 기록적 의미도 함께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과거를 위로하는 작업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히든 피겨스』는 단지 세 명의 흑인 여성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의 집단이었고, 동시에 시대를 바꾸어낸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과학과 젠더, 조직과 기회, 능력과 구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히든 피겨스’를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반드시 존재했던 이름들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의미 있는 기록 작업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